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헨리 1세 (문단 편집) == 생애 == 형 윌리엄 2세가 의문의 사고로 사망하자 그는 곧바로 윈체스터로 달려갔고 3일 뒤인 8월 5일 급하게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즉위했다. 원래 [[윌리엄 1세]]의 사남이었으므로 왕위의 정당한 계승자는 그의 큰형 노르망디 [[공작(작위)|공작]] 로베르 2세에게 돌아가야 했으나, 그는 제1차 [[십자군]] 원정에서 막 돌아오고 있었으므로 자리에 없었다. 하지만 상당수의 귀족이나 군인들은 로베르 2세를 정당한 계승자로 생각했으므로 헨리 1세는 로베르가 돌아오기 이전까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는 곧 자유 헌장을 선포하였는데 과세를 공평하게 메기고 면세대상이었던 교회의 수입을 금하며 왕실의 권력남용을 금지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였다. 또 애닉 전투 이후 소원해져있던 [[스코틀랜드]]와의 관계를 완화시키기 위하여 스코틀랜드 왕 [[맬컴 3세]]의 딸 마틸다와 결혼함으로써 외교적 안정을 꾀하였다. 그는 또한 형과의 불화로 스스로 캔터베리를 떠난 [[안셀무스]] [[대주교]]를 다시 불러들이기도 하였다. 얼마 후 로베르 2세는 예상대로 헨리가 즉위했다는 소식에 분노하여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로 침입하여 자신이야말로 정당한 왕위계승자라고 주장하였다. 헨리는 진압하려 했지만 문제가 헨리의 그동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귀족들이 대부분 로베르 2세의 편에 섰다. 하지만 헨리는 수많은 봉건 귀족들과 특히 켄터베리의 안셀무스 대주교의 절대적 지지를 바탕으로 군사력을 확보해 로베르와 대등한 싸움을 벌였으며 불리해진 로베르가 협상을 제시하면서 결국에는 타협안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한다. 이 타협안으로 로베르 2세는 잉글랜드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모두 포기하는 대신 노르망디 지방의 영토와 막대한 연금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로베르 2세의 통치는 노르망디 사람들의 불만을 가져왔고 노르망디 귀족들의 부탁을 받은 헨리 1세는 프랑스의 묵인 아래 1106년 노르망디를 정벌하여 탱슈브레 전투에서 로베르의 군대를 격멸하고 노르망디를 수중에 넣는다.[* 당시 전투는 양측이 6,700명으로 비슷했지만 헨리의 군대가 기병이 로베르 군대보다 3배나 많았기에 기병의 기동력으로 승리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패배한 로베르는 포로가 되어 잉글랜드로 압송되었고 엄중한 감시 속에 여생을 보내게 된다. 헨리 1세는 안셀무스와 초기에는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얼마 후부터는 불편한 관계를 이어가는데 이유는 역시 성직 임명권 때문이었다. 주교직과 수도원장직이 막대한 부를 가져올 수 있음을 알고 있던 헨리 1세는 수차례에 걸쳐 자신에게 임명권을 부여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당시 [[교황]] 파스칼 2세는 그의 요청을 매번 거절하였으며 이후에는 아예 세속 군주가 성직자들에게 봉토를 하사는 것과 성직자들이 군주들에게 충성을 서약하는 것을 금지해버렸던 것이다. 안셀무스는 이에 따라 헨리 1세로부터 임명받은 성직자들에 대한 축성을 거부하였으며, 왕에 대한 충성서약 역시 거부하였다. 결국 안셀무스는 헨리 1세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여 2번째로 캔터베리를 떠나 [[로마]]로 돌아오게 된다. 이러한 마찰은 왕과 교황 그리고 [[대주교]]들 사이에 수많은 편지와 회유, 협박이 오간 이후 1107년 탱슈브레 전투 직전에 웨스트민스터 협약으로 타결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왕은 성직 임명권을 포기하였으나 주교와 수도원장들은 축성 전에 왕에 대하여 충성맹세를 하고 경의를 표시해야 했다. 이는 후에 있을 [[보름스 협약]]에 본보기가 되었다. 말년에는 마킬다와 왕위 문제로 크게 대립하며 갈등했다. 여담으로 그의 죽음은 어이없게도 [[칠성장어]] 과식으로 인한 소화불량이 원인이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